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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이 남긴 유산
이건희 회장이 남긴 유산
  • 나경화 기자
  • 승인 2020.11.0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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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선 충남도의회 의장
김명선 충남도의회 의장
김명선 충남도의회 의장

이건희 회장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가는 길은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나 쏟아지는 애도의 물결을 보면 국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세기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주역인 이 회장의 별세와 관련해 다양한 평가와 보도가 엇갈린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승어부'(勝於父)와 이재용 시대 개막이다.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를 능가했으며, 이재용 또한 이건희 회장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평이다. 이러한 평가를 보고 있자면,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왔으며 이재용 부회장이 대한민국을 대표해 경제성장 신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한 편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삼성 신화의 이면에는 세습경영과 노동 탄압, 분식회계 등 불법행위가 있으며, 이를 눈감은 상태로 이건희 회장을 신격화하면 더 나은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우려다.

우리는 이건희 회장을 어떻게 기억해야만 할까. 이 대목에 우리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 교수인 그는 사피엔스를 통해 인간은 허구를 쫓아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의 질서에 따라 현실을 조작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에 따라 국가사회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쉽게 설명하면 상상하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과 현실은 구성된다.

이 회장의 공과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두고 벌어지는 이견 충돌은 21세기 대한민국 경제정의와 패러다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패권 투쟁이다. 이 회장에 대한 비판 없는 우상화는 지난 세기 경제 질서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20세기 우리를 지배한 경제정의는 성장과 경쟁 제일주의, 속도와 효율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믿음 속에 국가가 성장할 수 있다면 정부와 자본의 야합과 반인권적 행위가 있어도 감내하고 양극화가 발생해도 눈감아야 하며, 전체를 위해 때로는 개인과 환경이 희생할 수 있다는 정서적 토대가 담겨있다.

반면, 삼성 신화의 공과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한 욕망이 높아질 것이다. 새로운 경제 질서에는 속도보다 방향이, 경쟁보다 연대가, 독점보다 균형이 더욱 주목받게 될지 모른다. 특히, 누군가 우리 경제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메시아적 환상에서 벗어날 때 자유롭고 민주적인 가치에 기반한 경제 활동이 활력을 얻게 된다.

유례없는 대전환의 시대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욕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폭발적인 지식·정보혁명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정답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을 기회로 포착하려면 국민 개개인이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고 창의와 상상을 펼치는 민주적 주체로 서야만 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이건희 회장의 유산은 혁신이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며 낡은 것들을 극복하려 했다. 가족 빼고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은 험난하고 뼈아픈 여정이다. 그럼에도 새 시대에 우리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자, 유일한 자, 비교할 수 없는 자, 스스로 법칙을 세우는 자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가 상승하는 힘을 얻기 위해 이건희 회장의 공과에 대해 민주적으로 더욱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길 기대한다.